2013-09-03 10:56:04
상대방 공격하는 힙합 文化, 방송·광고·정치·사회로 번져… 네티즌 사이에선 일종의 '유희'
최근 화제된 '래퍼 디스전쟁', "컨트롤 비트 다운 받았느냐"="비방전 하느냐 " 유행어돼
발언의 자유 vs 존중의 타락… 쓴웃음 끌어내는 풍자보단 인신 공격 등 '욕설戰' 양상
회사원 이모(29)씨는 최근 페이스북에 직장 상사에 대한 불만 글을 올렸다. 곧장 친구의 댓글이 달렸다. '너도 컨트롤 비트 다운받으려고?' 이씨는 이 말이 곧 '상대방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겠다'는 선전포고이자 힙합에서 유래된 유행어란 사실을 알게 됐다.
최근 몇주간 인터넷은 '디스'와 '컨트롤'이라는 단어로 뜨거웠다. 발단은 뜻밖에도 힙합 음악이었다. 미국 래퍼 켄드릭 라마(26)가 미국 래퍼들을 향해 "똑바로 하라"며 디스곡 '컨트롤'을 발표한 이래 지난달 21일부터 10여명의 우리나라 래퍼들도 이 '컨트롤' 비트에 가사만 바꿔 디스 행렬에 가담한 것. '디스(Diss)'는 '디스리스펙트(Disrespect·결례)'의 준말로 상대방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공격해 망신을 주는 힙합의 하위문화를 일컫는다. 힙합 래퍼들 사이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사건이 '일상'으로 번진 건 최근 일이다. 이를 따라 하고 패러디하고, 심지어 일부는 이를 하나의 놀이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디스, 문화 코드로 자리 잡다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디스'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각종 패러디 동영상과 TV 프로그램의 디스전(戰)이 쏟아져 나온다. 소셜커머스 회사 '위메프'는 배우 김슬기를CF에 등장시켜 경쟁 회사를 '디스'하고, 케이블 채널 tvN '코미디빅리그'의 코너 '아3인'은 종종 KBS '개그콘서트'를 디스하는 방송을 내보내 화제를 모았다.
인터넷 댓글은 또 다른 '디스 놀이터'다. 일부 연예인·정치인의 막말 기사가 올라오면 '너도 컨트롤 비트 다운받았냐'라는 댓글이 순식간에 따라붙는다. 대학원생 김영모(28)씨는 "내가 한 번 (그런 댓글을) 달면 줄줄이 같은 댓글이 달리니 집단 놀이의 즐거움도 있더라"고 했다. 대중음악 평론가 김봉현씨는 "그간 우리나라에선 호전적 태도가 금기시되는 분위기였지만, 요새 젊은이들은 이를 유희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몇몇 방송 프로그램은 일찌감치 디스의 정서를 재미 요소의 한 축으로 삼아 왔다. 지난달 종영한 MBC '무릎팍도사'는 구설에 올랐던 연예인을 불러 직설적인 질문을 던지는 '독설 화법'을 예능 트렌드로 정착시킨 프로그램으로 꼽힌다. MBC '라디오스타', tvN 'SNL코리아' 등도 출연진의 감추고 싶은 과거를 건드려 웃음을 자아낸다. 안철수 의원,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 국내외 정치인을 텔레토비로 등장시켜 패러디한 SNL코리아의 '여의도 텔레토비'·'글로벌 텔레토비'는 방송이 정치를 디스한 경우다.
새누리당은 지난달 6일부터 31일까지 '디스 공모전'을 열기도 했다. '새누리당을 디스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새누리당에 불만 있는 2030 여러분을 위해 새누리당에서 멍석을 깔아드립니다. 여러 분들의 비난과 질타로 인해 새누리당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홍보했다. 디스의 확산에 대해 한국트렌드연구원 박성희 책임연구원은 "탈(脫)권위주의 문화가 확산하면서 비판의 성역이 사라졌고, 특정 대상을 지목해 비판했을 때 느끼는 양심의 가책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디스의 두 얼굴
디스의 확산이 은근하게 비판을 던지던 '풍자의 시대'를 후퇴시키고, 말초적인 욕설의 시대만 앞당겼다는 평도 나온다. 표현의 규제가 덜한 인터넷 방송이 대표적이다. 개그맨 샘 해밍턴은 지난 4월부터 개그맨 조원석과 함께 인터넷 방송 '디스보이즈'를 통해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된 방송인 비앙카, 일본 극우파 미즈노 교수의 실명을 거론하며 욕설까지 섞어 비난을 퍼부었다.
일반인들도 요즘엔 아프리카TV, 유스트림 등 개인 인터넷 방송국을 통해 시사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다. 이 과정에서 유언비어의 유통도 잦아져 디스의 확산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문화평론가 장원재씨는 "디스와 중상모략은 구분해야 한다. 그저 남을 깎아내린다고 다 디스가 아니라 사실에 근거해 '증오'가 아닌 '쓴웃음'을 끌어내야 디스"라고 지적했다. 경기대 청소년학과 이광호 교수는 "속을 털어놓는 것과 대놓고 욕하는 건 다른 차원"이라고 했다. "마구잡이식으로 누군가를 욕하는 문화에 익숙해지면 어린 세대부터 타인에 대한 존중이 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디스(Diss)
디스리스펙트(Disrespect· 결례)의 약자로 힙합 장르에서 랩을 통해 서로를 비난하는 행위를 뜻한다. 래퍼들 사이에서는 디스전을 통해 서로의 인지도를 올리는 홍보 효과를 누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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